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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09 이게 뭐라고.. 6
카테고리 없음2012. 8. 9. 02:55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아마 이스탄불에서 도하가는 비행기에 놓고 내린것 같다.

처음엔 정말 아무 생각도 안났고, 그동안의 이어지는 실수(?)에 대한 자책이 이어졌다.


왜 나는 노트북도 가지고 다녔으면서 여행동안 백업을 한번도 안했을까. 맨날 클라우드 공간 부족하다고 팝업떴는데 왜 정리한번 안했을까. 이스탄불 공항에서 대기하면서 사진을 옮길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왜 그때 안옮겼을까. 그동안 찍은 사진 동영상들 다 어떡하지. 여행다니면서 적었던 짧은 메모들.. 아깝다 너무 아깝다.

핸드폰도 너무 아까웠다. 흔치않은 락해제된 미국발매 폰이라 한국폰보다 이런저런 편한점도 많았는데. 심혈을 기울여서 골랐던 3만원짜리 범퍼도 아직 기스하나 안난 상태였는데.

그 전 백업들 있으니깐 6월자료까지는 살릴수 있을텐데 그 다음의 내 여행 기록들은 어떡하지. 아깝고 속상하고 자책했다.

좀 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에 적힌 수많은 내 개인정보들, 뱅킹정보는 바꾸면 될것이고, 나 편하라고 적어놓은 주변인들의 신상정보들, 여튼 작정하고 파고들면 얼마든지 나쁜맘먹을 수 있는 개인정보들. 차라리 말 안통하는 외국에서 잃어버린게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더 큰 여파를 가져올수 있는건가. 비밀번호는 잠궈놨지만 맘먹고 풀려면 풀수 있을텐데. 비밀번호 잘못 입력했을때 데이터 삭제하는건 꺼놓은것 같은데. 하필 잃어버린게 기내에서 비행모드인 상태라 전화를 걸어볼수도 없고.

내가 분명히 손에 쥐고 자다가...?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나왔는데. 바로 공항건물 가는 버스에서 생각해냈으니 분명 찾을수 있을텐데. 들려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못찾았다는것 뿐이다. 도하공항에서도. 한국공항에서도.

왜 착륙하면서 평소처럼 핸드폰을 켜서 현지시간 확인해볼 생각도 못했을까. 어쩐지 옆에 앉았던 인상 험악한 필리핀 남자애들이 찝찝하다는 생각에까지 미치면서 패닉에 빠져버렸다.

핸드폰을 잃어버린걸 알고 난 후 열시간의 비행은 정말 생애 최악의 비행이었다. 심지어 처음으로 비상구 좌석을 배정받는 행운을 얻었음에도 아무것도 못한채 잠도 안오고 거듭 와인만 청하면서 애써 잠들기를 바랬을뿐.


집에 와서도 한참 패닉에 빠져있다가 몇몇 주변인들에게 연락을 하고. 여행중 연락하던 함께 수업듣던 친구에게도 메일을 보냈다. 터키에서의 모든걸 잃어버린 느낌이라고. 위로좀 해달라고. 사실은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기록한 사진이라도 몇장 얻을 속셈이었다.

금방 찾을수 있을거라며 꼭 찾을 수 있을거라는 형식적인 위로가 돌아올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착한 답장은 상상 이상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해줄테니 들어보라며. 사춘기시절부터 7년간 만나왔던, '사랑이 뭔지를 처음 배웠던'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날 사고로 죽었단다. 그 자신도 죽어버릴것 같은 고통을 느꼈었다고. 그 뒤로 함께했던 모든 물건들, 사진같은걸 모으고, 기억하고, 간직하다가 어느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 정리했단다. 하지만 그 뒤로 소중한 기억들은 더 생생해지더라며. 물건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마음속에 간직하면 오히려 네가 원할때 언제든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는, 포크송 가사와도 같은 위로가 돌아왔다.


메일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내가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핸드폰 그게 뭐라고. 그 자료들이 뭐라고. 다 기억해낼 수 있는건데.

그러면서도 6월까지의 자료라도 붙잡고 싶은 맘이 들었고 복원의 편의와 익숙한것을 버리고싶지 않은 마음에 바로 또 아이폰을 사와서 몇시간째 복원하느라 끙끙대고 있었다. 그게 요 몇시간동안의 상황이다.


그러다가 아이클라우드 백업이 7월중순까지 있는걸 발견했고 이거라도 살려볼까 어떻게 해볼까 하는데 아이클라우드 백업은 백프로 복원이 되는게 아니었구나. 다시 재설치해보고, 지우고, 다시 깔고, 6월 백업파일로 복원해보고, 다시 지우고. 워낙 사용하는게 많아서 수백개의 어플들이 한번 깔렸다 설치되는데만도 시간이 한참 걸려서 결국 몇시간째 완료를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아까 받은 메일이 다시 떠오르는거다. 그러게, 이게 뭐라고..



사춘기시절 하드를 한번 날린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 충격이 몇개월을 갈정도였다. 오히려 그 뒤로는 백업에 집착하기보다 소중한 자료를 만들지 않는 쪽으로 선회했던것같다. 소중한게 생기면 너무 아프다는 사실을 컴퓨터 파일에서 깨달아버린거다. 하지만 수집병이 어디로 가겠나. 그 뒤로도 무언가를 모으고, 정리하는 취미는 계속되어서 종종 엄마의 핀잔을 듣곤했다. 적당히좀 하라며.


그리고 몇번의 상처를 더 받고. 물건에 대해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한발짝 거리를 두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던듯 하다. 그래야 안아프고 안힘드니깐. 그게 나한테 좋으니깐.


비싼 장난감따윈 사지 않겠다며 스마트폰 없는 생활을 고집하다가 처음 내 손에 들어왔을때도 주객에 전도되어 핸드폰을 '모시고'다니는 상황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점점 편리함에 매몰되어서 어느순간 모시고 다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익숙해지는게 싫다. 무섭다. 두렵다. 하지만 편리하다. 그렇게 나를 옥죄기도 하고 때로는 핸드폰때문에 누군가에게 무례하기도, 다른 무언가를 보지 못하기도 했고.


여행다니면서 종종 들었던 질문은 왜 한국애들은 맨날 핸드폰으로 한국애들한테만 연락하고 다른사람들하고는 안어울리냐는거였는데 뭐라고 대답을 못하겠더라. 그러게 말이다.

한국애들이 여행지에서 하는 일이라곤 남는건 사진!을 외치며 아마도 페이스북에 올릴 그럴듯한 사진찍는것밖에 없다며 최대한 피해다니던(?) 나였지만 정작 숙소에 와서는 나도 똑같은일을 하고있지 않았던가.


이것저것 정리하고 심플하게 살아봐야지. 지금같아서는 많이 지우고 없앨 수 있을것같다. 금세 아까워지는게 분명 생기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정리해봐야지.

뭐가 중요하고 뭐가 덜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되는 밤이다.


이깟 핸드폰이 뭐라고. 나한테 이런것까지 생각하게 한다.



Posted by bi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