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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1.30 내가 요새 이래 6
카테고리 없음2011. 11. 30. 23:28
예컨대, 어떤 고등학생이 공부 못하는 친구의 공부를 도와주거나, 장애인 친구의 등하교를 돕기로 마음먹었다고 칩시다. 당장 그 학생은 부모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물론 네가 좋은 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한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거다. 지금은 네 공부에 주력해야 할 때고, 좋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네가 만약 지금 공부에 주력하지 않아서 대학입시에 실패한다면, 나중에 너는 진짜로 누군가를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우선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일단 선한 일 하기를 뒤로 미뤄놓고 그 학생이 '좋은' 대학 법학과에 진학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웃을 돕고자 하던 원래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는 거다. 지금 네가 고시공부를 그만두고, 학생운동에 뛰어든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니? 고시에 한두 번 떨어지더니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다 하지 않겠니?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다. 우선 고시부터 붙고 나서 남을 돕는 일에 나서도 늦지 않다. 지금 네가 아무리 자유와 평등을 떠들어봐야 누가 네 말에 귀 기울여 주냐? 변호사 타이틀이라도 가진 후 뭔가를 말하는 것과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 말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먼저 너 자신부터 남들이 귀 기울여줄 만한 사람이 되는게 중요하다."

자, 이 학생이 열심히 노력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칩시다. 이번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때쯤에는 충고하는 분이 부모님에서 장인어른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갖춘 장인께서는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변호사는 원래 연수원에서 판검사로 임용될 성적이 안되는 사람들만 하는 거라면서? 자네, 그렇게 성적이 좋지 않은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다는 건 참 좋은 뜻이야.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네. 자네 무든 돈으로 개업을 할 건가? 그러고 자네가 아무리 '나는 성적이 되지만 그래도 변호사를 택했다'고 말한다 한들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줄 것 같은가? 아무리 자네 뜻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선은 판검사 임용을 받은 후 나중에 변호사 개업을 하는게 순서일세. 그래야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어. 단 하루를 해도 좋으니 일단 판검사 임용을 받도록 하게. 그 이후에는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뭐라 하지 않겠네. 그리고 남을 돕는다는 것은 원래 자기가 충분히 먹고 살 기반을 가진 다음에 가능한 일일세. 돈도 없이 어떻게 남을 돕나? 그러니 우선 자네부터 남을 도울만한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네."

장인의 말씀대로 좋은 성적으로 검사 임용이 되면 그가 자유로워질까요? 한가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층층시하의 검찰조직 안에서 괴로워하는 그에게 아마도 사람 좋은 선배 부장검사가 이런 충고를 해 줄 것입니다.

"일단 부장이 될 때까지만 참아봐. 그 다음에는 정말 자네 마음대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온다네. 부장도 못해보고 그만둔 사람을 누가 검사로 쳐주기나 한다던가? 이미 이 길에 들어선 이상, 지금 와서 길을 바꾸기도 쉽지 않네. 나중에 부장만 딱 달고 나서 개업하면 초기에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자네가 하고 싶던 좋은 일을 하면 되지 않겠나? 그리고 사실 검사 일만큼 보람있는 일이 어디 있나? 변호사만 남을 도울 수 있나? 검사야말로 약자들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자리지."

이런 충고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자녀들 사교육비로 엄청난 돈을 지출해야 하는 중년의 남성이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문구가 남겠지요.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겠다고 '생각만' 한 사람, 여기에 잠들다."


Posted by bidy